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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벽 외1편 / 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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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20-05-22

 

  © 시인뉴스 포엠



 

사랑의 벽

 

 

 

몽마르뜨 언덕 아래 한 벽이 나와 마주쳤다

빼곡한 전 세계 천여 개의 말이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

나 너 사랑해

사랑합니다

극ㅓㄱ 당신을 사랑합니다

 

낯선 기호들이 조합해내는 목소리,

벽은 목격하는 벽을 지나

익숙하게 다가왔다

 

나 또한 어쩌면

이국의 낙서에 불과한 사랑으로 쓰여진 것은 아닐까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 틈에서

말들이 서성인다 제각각

자신에 꼭 맞는 단어를 찾느라 분주하다

 

벽을 타고 내려오는 담쟁이 줄기 아래

모든 글자의 소리가 환하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천() 개의 고백!

 

어떤 벽이든 저리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그 중 몇 개의 글자는 나를 읽어가리라

일생이 해독되는 동안,

 

벽은 나를 불러 세웠던 것이다

 

 

 

 

사각지대

 

남들에게 주로 소개되는 그녀의 직업은 모델

알고 보면 최저 시급 받는 삼류 피팅 모델이다

사람이 아닌 옷을 돋보이게 하는 마네킹

오늘도 옷이 그녀를 입는다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미니 드레스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핀들의 위협을 견뎌야 한다

허리부터 가슴까지 죄여오는 압박

하루에도 몇 번씩 찢고 싶어지는 마음을

돌려가며 포즈를 취한다

완성된 피조물을 향한 그들의 표정 속 환희를

믿었던 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

 

그녀는 안다 쓸모가 다 하면

미끈한 두 다리만

스타킹 판매대에 거꾸로 세워지거나

뒤통수가 잘빠진 조막만 한 머리통만

참수당한 깃발처럼 가발 진열대에

내걸려야 한다는 것을,

 

 

 

 

2. 약력

 

한영미 / 서울 출생 / 2019년 『시산맥』등단 / 2020년 〈영주 일보〉신춘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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