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붉은 고추 외 9편 / 정이랑

- 작게+ 크게

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12-12

 

▲     © 시인뉴스 포엠



    

 

붉은 고추

 

정이랑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아
장독대 대소쿠리에 몸을 내맡긴다
햇볕이 눌러대는 시간 속에서
터져나갈 듯 비틀어지는 심장
한때, 구름 사이 끼어들어 바람의 길
확인하고 돌아오는 새를 보며 부지런히
바다 쪽으로 생각을 열어놓던 날도 있었지
지금은 애써 묻고 싶지 않다
마지막 올려다보는 하늘 끝 날아가는
청둥오리떼 어디로 가려 하는지
머리채 흔들며 가로질러 가던 젊은 날의
강물 같은 꿈 이제 누워 잠들거라
흙속 발 담그고 펄떡거리던 나뭇가지들
그 곁에 돌아갈 수 없구나
바람이 누워 있는 풀숲 근처의 쓰르라미 울음소리
희미해지는데, 나의 전부는
먼지처럼 가벼워질 수 없을까
다슬기처럼 달라붙은 밤하늘의 별 헤아릴 때
비로소 나의 온몸은 불덩이로 달아올랐다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정이랑

 

 

 

나는 남편과 말다툼 끝에 그곳을 나왔다
여자란 결혼하고 나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스정류소 앉아 나뭇잎 한 장 주워 잎맥을 살핀다
손바닥의 손금과 흡사한 길들이 선명하다
지나가는 저 사람 또 스쳐가는 이 사람의 길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작 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하겠다
횡단보도를 건너 갈 것인가 724번 버스 타고
관음동에 닿으면 가야할 길이 보일 것인가
나뭇잎들도 가야할 길 따라 떠나는 10,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나는
잠시 결혼한 것을, 아이 낳은 것을, 10년의 세월을
원망하고 억눌러 보지만 소용없이 넘쳐나는 눈물방울들
꺼이꺼이 나를 보고 울고 있는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하다
나는 안다, 골목길 구석구석 그가 찾고 있을 것이란 걸
애타게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 소리가 보인다, 공벌레처럼
몸을 말아 앉아 있는 나를, 그가 발견해 준다면 좋겠다
인적이 끊기고 버스도 잠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고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남편과 아이가 있는 그곳
전봇대와 나란히 서서 열어놓고 잠들어버린 대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겨울 은해사

 

정 이 랑

 

 

 

육신이 머물렀던 마을에서

영혼의 터를 찾아 당도한 겨울 산사

사람 그림자라곤 볼 수 없는, 낙엽만이 목탁소리에 끌려

바람에 쓸리고 있을 뿐 오래 비워둔 외길은

처진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늘을 찌를 듯한 가지마다

미끄러지는 이름 모를 산새의 잿빛 울음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한 줌 따스한 흙으로 뒤덮여 뼈마저 삭아지면

강물처럼 출렁이는 푸른 목소리로 살아나

말라버린 행인의 빈 가슴에 젖어들까 보다

발목이 시렵다 불빛 하나 없는 고요 속에

홀로 장작을 나르는 동승의 얼굴 가득 피어나는 미소

막 어둠 속을 뛰쳐나온 별빛 같았다

아궁이에 활활 타는 불속 저녁이 익고

낯설음이 타버리고 부끄럽게 살아온 날들이 화끈거렸다

얼어붙은 흉장까지 녹아내려 돌아설 때

동승은 인사대신 염주를 손목에 끼워 주었고

맺힌 눈물이 풀리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청어(靑魚)

 

정이랑

 

 

 

  아직도 가슴 속 바다에는 한 마리 청어가 숨어 삽니다 등 푸르고 허리가 미끈한, 이름만 불러도 청청 물방울 소리 튀어오르는, 그런 청어 한 마리를 풀어놓았던 것입니다 스무살, 서른, 마흔에 이르러 그 놈을 북태평양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는 몰래 무엇인가를 키운다는 것이 참 어렵고 고달픈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때로 아들녀석이 청어를 대신해 줄 것이라고 믿기도 하면서 10여 년을 흘러왔습니다 꼬리와 지느러미에 파도를 실어 헤엄쳐 나가는 청어가 보고 싶습니다 햇살을 통과하면서 벅차게 숨 쉬던 나의 청어, 청어를 불러내고 싶습니다 아아,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 그 동안 청어에게 무심했던 내가 청어를 볼 자신이 없습니다

 

  때늦은 오후 지하도 계단에 쭈구리고 앉아 사람들을 읽고 있는 나뭇잎 한 장, 나는 그 나뭇잎 한 장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람부는 방향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잎들, 그 속에 청어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불러보고 애타게 찾아봐도 가슴 속에서만 헤엄치고 다녀야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들은 알겠지요 그래도 잠시 이 순간 청어를 생각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그다지 외롭지 않은 듯합니다

 

 

 

 

 

      

어느 날, 문득


정 이 랑

 

 


눈을 떠 보니 선인장 하나가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었다, 왜일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도대체 왜?
사람의 곁에서 훌쩍 떠나버린 것일까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지른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걸까
며칠 째 답답한 가슴만 움켜잡고 있다
아프면 병원으로 가듯 꽃집을 찾아갔다
햇볕과 놀게 하셨나요? 물은 주셨습니까?”
이제야 알았다, 나의 무식함 때문임을
나는, 나도 모르게 가해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나에게로 온 이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던 것
선인장에게 물은 주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꿋꿋하게 나만 지금껏 잘 살아온 것이다
아아, 이를 어쩌나!
그래, 또 누군가에게 잘못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을까
가시 없는 말이 그대에게는 비수일 수도 있었겠지
아아, 참 미안하다 그대여!
한동안 선인장 앞에서 성호를 긋고
두 손 가지런히 모아 눈을 감아본다

 

 

 

 

 

    

 

 

돌탑 

 

정이랑

 

 

 

앞서간 누군가의 소원 하나를 바라봅니다

간절한 마음이 놓여 기둥이 되고

하늘 한 곳을 잡아당겨 발을 묶습니다

돌멩이 하나를 주워 바라보게 되는 탑

나에게 간절한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냥 돌멩이 하나일 뿐이 듯

나도 하나의 돌멩이일 뿐인데

움켜쥔 손아귀에서

쉽사리 놓아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살아온 것들이 길이 되고

다시금 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저 탑은 오늘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앞서간 사람의 인생처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서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없는, 나를

꼭대기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싶습니다


*소설가 박경리 유고시집 제목

 

 

 

      

 

 

 

까치집

 
정 이 랑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리라
저 가파른 모서리에 집 한 채 들어섰음을
밤낮 가리지 않고 흐르는 고압선 무시하며 지은 집
무슨 말 못할 사연 싸락눈 같이 뿌려놓고
언 손등 비벼가며 이사 온 것일까
전봇대 올려다 보면
늑장 부리며 걸어가는 떼구름 속 하늘이 흐려온다
너희인들 산밭뙈기 팽개치고 싶었으랴
미루나무 밤나무 마당 깊은 집에 사는 감나무
몇 차례 쫓겨다니다가 어쩔 수 없어 마지막
어금니 물고 실한 나뭇가지 끌고와 설계했으리라
칭얼대는 아이의 입안에 사탕 하나 넣어주며
동지섣달 찬바람 짊어지고 양식 찾아 나서는데,
그래도 새집에서 산다는 것이 좋았을까
저들끼리 입술 모아 조잘대고 있다

 

 

 

 

 

    

 

 

아름다운 비상금

 

정이랑

 

 

 

 

생활비가 모자라서 돈 달라고 하니 남편은,

서재방 어딘가에 백만 원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만 권도 넘는 책들을 뒤져보라는 것인가

얼치기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책 속 백만 원은 자신의 비상금이라고

찾을 수 있으면 내 비상금으로 쓰라고 한다

밤 새워서라도 찾아내고 싶어졌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

시계 돌아가는 방향에서부터 훑어내려 갔다

먼지투성이 속에 가지런한 책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누렇게 바랬다

입 벌어진 시집 속에서 발견한 건

이십대 여자의 사진 한 장

아름다움은 젊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끼고 하얀 이를 드러낸 그녀

백만 원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배경으로

멈추어 있는 시간을 보고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구나

돈만 있으면 주름도 없애고

, , , 턱까지 고쳐 미인이 되는 세상

남편의 비상금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찾게 된 나의 아름다운 비상금,

시집 속으로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한다

 

 

 

 

 

      

 

 

 

남은 숙제


정이랑

 

 

 

이슬을 걷어차며
텃밭으로 가는 길, 문득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생각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은 구름끼리 흘러가고,
바람은 바람과 발맞춰가고,
산은 산새를 품고 들판은 산을 이고,
나는 풀잎처럼 낮은 마음으로
저들과 이웃해서 살아가려 한다

 

 

 

    

 

 

 

와송

정 이 랑

 


바위 위에서 소나무처럼 자란다고
당신을 바위솔이라고도 부르더군요

항암작용에 좋다는 와송,
갑상선암으로 주름살만 늘어난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어
망설임 없이 뿌리채 뽑았지요

무엇이든 몸 속의 것이라면
다 꺼내어주고 싶은데
당신만한 효능이 저에게는 없더군요

병상에서 링거 맞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눈물이 흐릅니다

세 살이 되던 겨울밤이었을 겁니다
경끼한 나를, 어머니는 버선발로 업고
이웃마을 칠성할멈에게 갔었지요

그래요, 어머니에게 오늘만큼은
와송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약력>

 

경북 의성 출생. 본명 정은희.

1996년고은 오세영시인 심사에 의해 불교문학상 시 당선.

1996년 신경림 정진규 이지엽시인 심사에 의해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1997년 이근배, 문정희 시인 심사에 의해 정지용시문학제 시당선.

1997꽃씨를 뿌리며4편으로 문학사상신인발굴에

송수권 유안진시인 심사에 의해 시가 당선되어 등단

1998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500만원 수혜시인으로 선정(심사:오세영 정희성 김명인시인). 

2005년 첫시집,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시안 황금알)발간.

2011년 두번째시집,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문학의 전당)발간.

2018년 세 번째시집, 청어(천년의시작)발간,

계간 <시와 소금> 기획위원.

현재, 대구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달성문인협회, 죽순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 시인뉴스 포엠.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