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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외1편 / 홍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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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12-01

 

▲     © 시인뉴스 포엠



 

자화상

-슬픔 부자

      

홍수연

 

 

 

 

 

내게도 그토록 기다리던 보랏빛 오디의 계절이 오고야 말았다

누구도 그립지 않은 음악의 날들

내가 나로서 지상에 꽃피울 수 있는 날들

나는 지름길만을 피해, 교과서에 적힌 길들만을 피해 멀리 흘러 흘러왔다

후회는 승부사의 것

삶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비기는 것임을 아는 자의 것

떠나는 그대의 처진 어깨 위에, 떠나려는 그대의 거친 손등 위에 구름 한 조각 쥐어주고 싶은,

이 무슨 망발인가

세월에 배운 점이 있다면 슬픔을 모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잠자리에 나는 없었으며 나의 자궁은 너무 일찍 고독을 알아버린 죄로

세상에서 길러지고 세상에서 버려졌다

비바람 휘몰아치는 날이면 홀딱 젖은 머리카락으로 풀 섶을 헤매었고 어김없이 풀들은 웃자라 있었다

빗물이 뚝뚝 듣는 치마를 두 손으로 비틀어 슬픔을 모았다

내게 슬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흑진주

나는 슬픔 부자였다

무엇이 그리 슬펐냐고 물으면

나는 막연히 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늘 구름 밤 아침과 저녁 무엇보다 그대,

 

안녕, 그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슬픔의 백만장자, 그대

 

나보다 더 부자였던

슬픔의 억만장자, 그대

 

 

 

 

 

 

 

 

 

발아

      

홍수연

 

 

 

 

 

씨앗은 돌덩이 같은 흙을 어떻게 뚫고 나오나 몇 날이고 화분 곁에 앉아서 씨앗을 품은 흙을 손으로 매만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배아는 고통을 느낄 줄 모르기에 낙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이도 있었지만, 그는 장마 지던 날 피 묻은 태반과 함께 강으로 떠내려가고 말았지만

 

자궁 속에서 태아는 열 달을 허우적거리며 한 줄기 빛을 찾아 머리를 내밀었을 것입니다 배가 점점 불러오는 흙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씨앗은 지금 깜깜한 자궁 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해대고 있을 것입니다

 

발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목숨을 건 사투입니다 전력을 다해 발아한 당신과 나, 죽기 전까지 발아할 당신과 나는 살아남은 꽃입니다

 

 

 

 

 

 

 

.2018<모던포엠> 등단, 시집으로 즐거운 바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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