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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울 때마다 울었다.외9편 / 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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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9-25

 

▲     © 시인뉴스 포엠




그리울 때마다 울었다.

 

어제도 울었다. 슬프지 않는 데도 울었다. 울 때가 아닌 데도 울었다. 울음 한 철이 아닌데도 울었다. 울다 잠들면 잠들어도 울었다. 꿈속에 나가 울음이 강물을 이룰 때까지 울었다. 내 안에 수천수만 톤의 울음이 출렁이는 것에 놀라며 울었다. 울려고 태어난 것처럼 울었다. 질 좋은 곡비처럼 찰 지게 울었다. 우는 법도 모르며 울었다. 달래도 울었다. 달랠수록 더 울었다. 달래지 않아도 울었다. 달랠 때보다 더 울었다. 울든 말든 세월은 가는데 울음으로 세월의 바퀴를 돌리듯 울었다. 울음의 나라에 온 듯 울음의 백성처럼 울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운 것이 아니라 사실 그리울 때마다 울었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년을 기념해 팡파레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이 휘날리는 복사 꽃잎, 꽃잎

백년 복사꽃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의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년 복사꽃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 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낙과

 

한 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만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이차는 햇살에

한 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 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 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블랙홀

 

점묘화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비명도 없이 이 도시에서 흡입되거나 자진해 와 짜부라진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견고한 담도 점, 비밀을 잊은 자물쇠도 점, 무엇을 봉인 할 수 없는 점, 도시마저 점묘화 한 점, 우리가 만든 신화나 우리가 최고라 치켜세우는 구조물도 단지 점 하나, 블랙홀의 날름거리는 혀에 우리는 농락당하고 블랙홀의 감언이설로 우리의 이성은 마비된 채 검은 점으로 흐르는 것이다. 흘러와 점묘화를 이루는 것이다.

 

모두 짜부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함께 짜부라진 탓이다. 아무리 자기의 영토를 위해 철조망을 치고 접근금지구역의 팻말을 세우나 점 하나에 불과하다. 어디나 작용하는 블랙홀의 법칙,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든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 블랙홀로 빨려들어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도 엄청난 허망, 하나 전략을 바꾼 블랙홀에 마법에 걸린 듯 우리는 블랙홀에 들어선 것이다. 블랙홀 안에서의 산책 블랙홀 안에서 바라보는 싱그러운 햇살로 블랙홀에 가진 두려움이 무감각해진 것이다.

 

명아주 푸른 날도 블랙홀의 날이다. 인동초 열매 익는 날도 블랙홀의 날이다. 파라안테나로 꿈이 송수신되나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생리가 순조로운 것도 블랙홀 안에서의 일이다. 블랙홀의 강압장치 출력을 높이면 점이라 믿던 우리의 존재마저 사라진다. 아직은 그런 일이 없어 빛나는 눈동자, 자잘한 쥐똥나무 열매, 강가에서 읽는 물새 발자국, 으깨어지지 않은 사랑의 가녀린 어깨, 몰락하지 않는 그리움, 아직은 블랙홀의 초기, 우리는 점묘화의 점 하나가 맞을 것이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월출이 형

 

월출이 형 까치로 형수인 암 까치 데리고 아파트 단지 참죽나무 숲에 무허가 집 한 채 짓고 사는 것 안다. 사람 좋은 월출이 형 원양어선 탔다는 소문도 있고 월북 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구구단 하나 글자 하나 못 읽어 동네 애경사나 굳은 일을 담당하던 월출이 형, 무학에 무식에 방위도 현역도 되지 못해 개구리 복 입고 싶어 개구리 복 입고 다니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아 죽도록 맞아 반병신 된 월출이 형, 실연해 날마다 아카시아 숲에서 트럼펫을 밤하늘로 불어 올리다가 끝내 음독한 친구 동규보다 더 슬펐던 월출이 형, 저렇게 돌아와 살 줄 알았다. 형수와 가까스로 나뭇가지 물어다가 지은 월출이 형 집, 눈 대충으로 배웠지만 바람이 불수록 더 단단히 다져지는 공법으로 지은 집. 한 배의 자식을 낳고 또 어디로 가려는지 자꾸 행적이 궁금해지는 월출이 형, 오늘은 나를 알아보고 형수와 함께 짖어댄다. 고맙다. 월출이 형. 아파트 사람들 공손히 인사해도 시큰둥해 모두가 낯설어지는데 대놓고 안다고 떠드니 기분 좋다. 월출이 형. 그리고 형수님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십오 촉 사랑

 

그대가 내 곁에 오기만 해도

그대가 내 스위치를 누른 듯

나는 탁 하고 켜진다.

 

그대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동센서가

나에게 내장되어있는 듯이

내 우울마저 십오 촉 등처럼 탁 켜진다.

 

환히 켜진 나를 가지고

그대가 나와 상관없는 누구에게

애정의 편지를 쓰든지 말든지

손톱 발톱을 깎든지 말든지 알 바 없다.

나는 그대로 인해 켜져 기쁠 뿐이다.

 

내가 그대 곁에 가더라도

그대도 탁 켜지기 바란다.

 

우리 서로 십오 촉 등이 된다면

어두울 곳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이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만추

 

어머니 아침에 봉선화마저 다 시들고 끝물이 온 꽃밭을 보시다가

오늘 아버지 무덤에 가서 좀 울고 오겠다고 하신다.

 

슬픈 일을 보면 다른 슬픈 일이 떠올라 우는 것이 사람이야

곡비가 우는 것도 죽은 사람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제 생이 슬퍼서 끝없이 곡하고 우는 것이야

 

내 어릴 때 돌아가신 네 아버지 부르며 비린 눈물 좀 흘리며

속이 후련하도록 울고서 집으로 돌아올게.

 

너는 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곡도 울지도 잘 못하더니

불효막심한 놈 같더니만 내 심정 알아, 울어본 사람이 우는 거야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나라를 위해 내가 울 날이 있을지도 몰라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뭐 별 뾰족한 수가 있느냐.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고 눈물을 보일 때 보이는 거야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울고불고하며 생에 눈물 조금 보테는 거야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몽환의 집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집에 어둠이 왔다. 자주 생살구가 지붕에 떨어져 살아있나 죽었나. 안부를 묻고, 지병인 그리움이 또 도진 참죽나무 숲은 뒤란에서 아프다. 꼭꼭 여며도 바람 드는 세월, 삼꽃 피는 날, 백년 우물물을 길어 벌컥벌컥 마시면 오늘의 갈증은 말끔하다. 탁발을 나섰던 동자들이 저무는 골목을 따라서 돌아오고, 산 제비는 깎아지른 절벽의 둥지로 돌아갔다. 생각하면 눈시울 젖는 살림살이, 별빛의 온기마저 가만히 거두어 구들장 식은 안방으로 들이고 싶은 마음, 켜켜이 포개어 잠든 어둠마저 어린 자식처럼 정겨운데, 단수와 단절이 된 집이지만 늦은 저녁상을 물리면 하나 남은 촛불로 환해진 집, 밤이 깊어지자 캄캄한 집, 한 땀 한 땀 사랑을 박음질하는 소리만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애련리

 

가자, 낡은 노트와 책과 그리움아, 단벌의 그리움아, 읽다만 문장들아

재가 될 이름들아, 푸른 사막을 꿈꾸는 늙은 낙타의 지친 눈빛아, 돌아오지 않는

부메랑아, 세월아 가자, 파혼의 새들아, 상처로 아물지 않는 연못의 수면아

은마야, 가자, 헝겊으로 기운 꿈을 꾸더라도, 왕관을 쓰지 않았더라도

총칼을 들지 않아 무기력해도 가자, 애련리로 신분도 명분도 없이 애련리로

솔밭으로 불어가는 바람처럼 지평선이 없더라도, 수평선이 보이지 않더라도

청미래 익어가는 애련리로, 노 시인이 별을 깎고 새벽으로 담금질해 시를

만드는 애련리로, 활화산이 없어도 사랑이 뜨거운 애련리로, 머위 잎 푸른

애련리로, 빗방울에 맞아도 풀이 즐거워하는 애련리로 가자, 애련리로

빛나는 모든 진리를 앞세워, 발달된 물질문명은 뒤로 두고 애련리로 가자

옷자락에 묻은 광장의 함성을 털어버리며 데모대와 진압대가 겨루는

참혹한 풍경은 내버려두고, 우리 빛나는 이마로 애련리로 가자. 머뭇거렸던

물봉선화를 닮은 수줍은 한 시대야, 욕망에 찌든 모든 육체들아, 사랑들아

피신처를 제공했던 모든 담을 무너뜨리고 애련리로 가자, 우리가 가고 나면

줄 장미 핀 세월이나 오게, 우리도 애련리로 가 애련리 물소리로 그간

더럽기만 했던 우리 입술과 가슴을 씻고 먼 동 틀 때 비로소 기지개를 켜게

밤이면 태몽 깊어져 고고성이 메아리 칠 애련리로, 우리 사상 숨어 살 곳으로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극에 달한 이별

 

상가에 호상이네. 호상이네 하며 사람들 몰려드네.

 

여기 고기 좀 더, 술 좀 더 하며 이렇게 먹어야 가는 사람도 좋지. 낮부터 불콰해진 문상객들 이리 저리 앉아 그 어른 참 좋지 하며, 이야기에 살이 붙어갈수록 희망 슈퍼에서 궤짝으로 술 배달오고, 잡은 돼지 바닥 나가는데, 밤이면 신이 난 듯 더 밝게 피어오르는 조등인데, 그 틈에 쓱 끼인 막내 딸 이야기, 참 그 어른 돌아가셔도 눈 편히 감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 듬성듬성 들리는데 집에 오기는 올라나, 오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데, 선산 집안 재산 다 거들내고 종적을 감춘 막내딸 이야기, 그 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딸의 남편이 나쁜 놈이라며 성토를 하는데

 

벌컥 대문 열고 들이닥치자마자 몸부림치며 딸이 쏟아내는 통곡, 저 극에 달한 이별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에 수록

 

 

 

  

 

 

 

 

김왕노 약력

 

 

매일신문 꿈의 체인점으로 신춘문예 당선

경북 포항 출생.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그리운 파란만장(2015세종도서 선정)』『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2016 세종도서 선정) 』『리아스식 사랑 (2019)』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2019)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2018년 올해의 좋은 시 수상 등 축구단 말발 전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현재 문학잡시와 경계주간.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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