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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외9편 / 이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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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9-05

 

▲     © 시인뉴스 포엠



하루

 

 

고삼저수지 가에 오래도록

서 있어 본 적이 있다

 

바람은 언제나 다르게 온다

발끝으로 다가오던

어느 바람의 물결은

왕모래를 굴리며 발바닥마저

거머쥘 듯 달려들기도 한다

 

바위에 넘어지는

자전과 공전의 하루

 

저 바람 속에

저 물결 속에

서로 다른 내가 들어 있다




별을 씹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ㄷ르리는 별

별을 따서 씹어 본다

흐리거나 맑거나

자줏빛 흰빛으로 피어나는 별

색깔마다 분명 다른 맛이다 우주의 맛이다

 

누군가 쓸쓸히 지나는 길이면

허리춤에서 춤추고

누군가 다가와 기다리는 길에

머리 위로 일렁이던 별

지금 창백한 얼굴이 거기 있다 우주의 이정표다

 

밤을 새워가며 웃던 얼굴이

한 때 쇳덩이를 가공하던 손이

낮별을 낳았다

별을 품은 사람은 언제나 꿈을꾼다

 

날아갈 듯 두 팔을 뻗어 올리며

출퇴근길을 기뻐했던

은하수 공장 그 사람

오늘 다시 별을 찾아 나선다

 

도라지 화단은 풀숲으로 덮이고

은하수 담장에 기대앉아

하얀 별 하나 따서 씹는 입술이 쓰다 우주의 맛이다

자줏빛 별 하나 가슴 위로 솟구친다

별들이 뱃속에 숨어

슬퍼지는




라일락 혁명

 

 

 

8, 라일락이 제멋대로 웃자라 있어 가지치기했다

햇볕과 공기가 맘껏 드나들었다 시원했다

그러나 오해였다

하나둘 잎이 말라가더니

잎이 다 지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예 밑동을 베어버리면 새싹이 돋을까 고민하는 동안

 

돌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다시 봄인 줄 알고 꽃을 밀어 올리고

잎이 새롭게 돋아났다

옛사랑처럼 은은한 향기도 품었다

무슨 표현이든 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혁명을 감행한 것이다

그동안 줄기 안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일홍 꽃들이 박수를 치며 가담을 했다

그들 내면에서도

알 수 없는 백 일 동안의 혁명을 꿈꾸고 있었나 보다

 

불금초 패랭이 비비추도 가담했다

꽃을 피우느라 열을 올렸다

그들에게도 꽃 피우는 일이 혁명이었던 모양이다

 

만물 본연의 역할은 꽃을 피우는 일일 것이다

나도 사랑의 꽃을 피우느라

사랑의 둥치를 잘라버린 적이 있다

그게 실수였다 꽃을 잘 못 피워 올렸던 것이다

 

꽃을 피우려 한다면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낼 필요가 있다

길을 벗어난 생각과 겉치레의 가지들에게

햇살과 허공을 보여줘야 한다

 

햇살이 안부를 묻고 그림자가 핏줄까지 선명해질 때

혁명이 일어난다

꽃이 만개한다

향기가 넘친다





포로

 

 

 

집에 도착하자

내 어릴 적 옆구리에도 차지 않던 오동나무가

먼저 나를 반긴다

지금은 담 너머까지 가지를 뻗은

나보다 더 오래

엄마 곁에서 자라난 새끼다

 

기껏 일 년에 몇 번 찾는 고향 집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지키고 있는 그 핏줄

애초부터 탈출을 꿈꾸지 않는 오동나무

그 옆구리에 어머니는 빨랫줄을 묶어 놓으셨다

 

술 몇 잔 마시고 마루에 벌러덩 누워

그를 바라본다

이제는 내 어깨 아래로 처진 많은 가지들

어머니의 포로는

오동나무가 아니라

쓸쓸해서 돌아눕는 나였다




솥을 걸다

 

 

 

오십 년 그을음을 씻어내자

구석구석 그을음에 갇힌 시간들이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대대로 한 가마 밥을 짓던 가마솥

뭇 중생들에게

밥이 아니라 시를 공양해온 가마솥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염불을 외다가 이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앉아있는 모습이 꼭 부처님 같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나와

제 솥 안에서 하얀 영혼의 쌀을 받아 안치고

쌀밥을 짓는다는 건

본래의 자기 모습을 보는 일

모든 생에 새 기운을 주는 일이다

 

오늘 나는 내 안에 가마솥 하나를 걸었다

뚜껑을 열자 오십 년을 기다린 詩眼시안이

들어와 앉는다

두리번거리고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앙가슴에 큰 돌 하나 고이고

석가헌*

여름을 넣어 끓인다

 

 

*석가헌 夕佳軒: 서고 書庫 律呂精舍가 있는 정진규 시인의 집






바코드

 

 

 

내 손에 쥔 스캐너를 갖다 대어야만

읽을수 있는 암호

 

사랑한다고 처음 말하던 날

그대 마음 읽으려는데

바코드가 없다

 

새긴 적 없으니

있을 리 없지

 

어디에 새길까

갈비뼈에 새길까

아니다

그대 가슴에 새겨 붙이기로 한다

 

그대는 얼마쯤일까

싫다

가격을 매기는 건

 

바코드로 찍을 수 없는 그대





한 끼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배고픈 기분을

너는 아니?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몇 시간을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냐구

 

만만한 구석이 없어 편의점을 찾게 되고

편의점에서도 빙글빙글 한 바퀴를 다 돌며

할인행사 하는 걸 찾다가 결국

라면 한 개 삼각김밥 하나 사들고 나올 때

너 그 기분 아냐구

 

그렇게 통화하며 문을 나서는

한 젊은 아가씨가 있었다




달이 잠드는 시간

 

 

 

새날 새벽은 둥근 창을 가졌어

푸른 몸이 온통 젖어 있어

 

도둑고양이가 살며시 눈꺼풀을 치켜 올릴 때

숲 사이로 첫날밤은 흐르지

달빛인가

속옷차림으로 내 곁에 다가와 앉는

아직은 어슴푸레한 저 눈동자

 

별들의 손끝과 손끝이 맞닿는 거리에

달이 잠드는 시간이 있어

한 고요가 말없이 풀어지면

다른 적막이 꿈틀거리는 우주의 소리가 들려

 

해와 달의 장례식엔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있어

밤새 하늘을 걸어온 터질 듯한

소리, 소리들이 숨 쉬고 있어

 

두 손을 모아봐

기다리고 선 오늘이

음악처럼 커지고 있어

이슬을 털며 숲이 깨어나고

달아나던 고양이가 물끄러미 돌아보고 있어

 

새날 새벽은 둥근 창을 가졌어

몸살 하던 경계를 말끔히 지워가고 있어



 

전봇대가 있는 골목

 

 

 

앙상하게 흔들리는 소녀의 입맞춤 소리를 듣는다

여린 소녀가 쓸어 넘기는 기침 소리인가 싶다가

매를 맞고도 달아나지 못하는 돌인가 싶다가

얼어버린 하늘을 본다

빙판을 미끄러져가는 한 잎 낙엽

지그시 감았다 뜨는 새의 눈꺼풀이 무겁다

혼잣말처럼 다가오는 쪼글쪼글한 바람

소년은 젖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눈이 오지 않아도 밤은 하얗다

눈동자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

그 뒤를 따라오는 다른 발자국 소리

뚜벅뚜벅 공포가 밀려와도

닫힌 풍경을 열 수 없다

소년이 뚝, , , 녹아내리고 있다





층층나무 꽃

 

 

 

투명해진다

아파트 담장에 부딪쳐 돌아오는 가냘픈 뻐꾸기 울음

고요는 깨지고

어머니께 가지 못하는 그리움의 통점이

새벽 4시에 멎는다

 

이 시간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 닮은 할머니 한 분

어디를 가시는 걸까

베지밀 한 병 사려고 허리춤에서 꺼내는

돌돌 말린 비닐지갑

지갑을 풀자 습기 찬 비닐 속에서

녹슨 동전의 울음보가 터진다

 

전깃줄에 앉아 울던 뻐꾸기가

내 분주한 일상의 핑계를 물고 날아간다

어머니의 새벽을 깨울까 염려되어

나는 할머니께 공손히 인사하고

뻐꾸기 비행방향과 등지고 앉는다

 

뻐꾸기 울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날갯짓에 창밖 층층나무 꽃만 후드득 떨어져

환한 꽃길이 되었다






이정오 프로필

 

충남 출생

아주대 영어영문학과 졸

2010년 계간 <문장> 신인상

시집 달에서 여자 냄새가 난다

층층나무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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