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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중 외9편 / 이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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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8-03

 

▲     © 시인뉴스 Poem



명중

 

 

 

빗방울이 툭,

정수리에 떨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하늘 쳐다본다

 

누구인가

저 까마득한 공중에서

단 한 방울로 나를 명중시킨 이는

 

하기야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나의 심장을 관통해버린

그대도 있다

 

 

 

 

 

 

     

그믐

    

이용헌

 

 

 

 

은가락지를 입에 문 검은 새가 천공으로 날아간다

 

얼마나 날고 날았을까

 

슬픔의 무게로 기울어진 오른쪽은 닳아 없어지고

 

고독의 순도로 담금질한 왼쪽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은가락지를 떨어뜨린 검은 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영겁을 물고 왔다 영겁을 놓고 가는 우주의 틈서리에서

 

소리를 잃은 말들이 침묵으로 반짝인다

 

한순간 나를 잃고 몸 밖을 떠돌던 내가

 

언약도 없이 당신을 맞는다

 

당신의 가는 손마디가 동그랗게 비어 있다

 

 

     

 

 

 

무문관(無門關)*

 

 

 

이 동굴의 나이를 알 수 없다. 백억 년이라고도 하고 오십억 년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영혼이 스며든 흔적으로 보아 삼십만 년밖에 안 된 흙구덩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서 천지가 창조되었고 생명이 잉태되었다는 거다. 나는 한때 탯줄에 의지하여 살던 수생생물이었으나 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동굴에서 나를 던진 뒤 낯선 이곳의 문을 닫아버렸다. 한번 닫힌 문은 열 수가 없어서 하릴없이 나는 천장에 박힌 별을 세거나 벽화에 그려진 초근목피를 씹으며 육생생물로 진화했다. 발밑을 휘도는 물줄기를 따라 채집에 나서거나 도망가는 사슴의 등에 창을 던지는 짓은 생존을 위한 일, 대체적으로 이곳의 풍토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빛보다는 어둠이 발호하는 체제, 시간은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흘러가고 욕망은 어둠 속에서 인광처럼 반짝거리기도 한다. 가끔 이 동굴을 벗어난 영혼들이 새들로 가장하여 찾아오기도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수생생물이었으므로 부엉이 울음이나 쇠기러기 소리를 아주 믿지는 않는다. 나도 잠시 날개가 있었으면 하고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누군가 멀리 떠나간 뒤, 그러한 날은 전생의 태아처럼 웅크린 채 동굴의 구조만을 떠올렸다. 하나 아무래도 난 이 동굴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별이라고도 하고 지구라고도 하고 혹자는 이승 밖 더 큰 동굴에서 던져진 마지막 유폐지라고도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도 돌아갈 문이 있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기껏 수생에서 육생으로 진화했을 뿐이므로 저 높은 곳에나 있을 법한 문을 찾아낼 방도가 없다. 다만 자신의 동굴에서 나를 내던진 어머니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현신한 어느 날, 얘야 잘 견뎌냈구나, 하며 하늘 문을 따주기 전까지는.

 

 

 

 

*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문을 봉해버린 수행처.

 

 

 

 

   

 

 

어느 오,

 

 

 

구름 위를 걸어가는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는 맨발

맨발로도 갈 수 없는 길은 없었다

 

후박을 오동으로 알고 한철을 기다린 눈먼 새가 있었다

새의 이름은 후조

후조는 후박열매 같은 눈을 감고

오동나무 잎 같은 귀를 가진 코끼리 등에 내려앉았다

 

발 없는 맨발로도 갈 수 없는 길은 없었다

 

부처는 신을 신지 않고도 일생을 살았다

마음속에 신을 모시는 자만이

몸 밖에 신을 신고 혹은 질질 끌며

끝내는 지옥으로 들어간다

 

천년을 걸어와 벽 속에서 사는 코끼리도 있다

코끼리는 오동을 후박으로 알고

오동나무 잎 같은 귀를 펄럭이며

후박나무로 짠 관 속에 누웠다

 

혹자는 집채만 한 코끼리가

어찌 관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냐고 묻겠지만

불전 위를 날아본 작은 새도 그쯤은 알고 있다

오동이든 후박이든 코끼리든 사람이든

제 발 딛고 사는 곳이 육방벽 관이라고

 

그러하매 발바닥에 병이 돌아 요사채에 걸터앉은

나여, 나여,

후박나무 등걸을 오동으로 알고 한 그늘을 쓰다듬은

이 눈먼 애연(愛緣)은 어느 발등 위에 내려놓을 건가

 

 

 

 

 

오이에 대한 오해

 

 

오이를 씻다가 오이의 돌기를 만지는 여자와

오이를 먹다가 오이의 껍질을 내뱉는 남자가

오이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할 이유는 없지만

 

오이가 하필이면 오이라는 이름을 달고

오랫동안 숨겨왔던 덩굴손의 내밀한 버릇과

오이만이 간직한 연둣빛 향의 비밀에 대해

주절주절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오이는 오이로서 오해가 없기 때문이다.

 

오이는 세상에 순()을 내미는 그 순간부터

오로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올라타고

무엇인가를 움켜쥐지만

단지 오이라는 이유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오이꽃을 피우고

오이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매달고

오이 향을 피우며 상큼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이의 돌기가 오백이십 개였으면 좋겠다는 여자와

오이의 돌기는 오십이 개라도 쓸모없다고 우기는 남자가

오이를 사이에 두고 때아닌 말다툼을 벌이지만

오이는 오이로서 갖춰야 할 예의와 품위와 겸양이 필요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두 뺨에 오이를 저미어 붙이는 여자와

저녁을 대신하여 오이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남자는

오로지 오이의 껍질을 벗기는 날카로운 칼 외에는

서로 공유할 아무런 도구가 없다.

 

그럼에도 오이는 제 이름이 왜 오이인지.

날마다 제 살을 깎는 칼의 이름은 왜

오이 칼이 아닌 감자 칼인지.

도무지 아무런 연유도 모른 채

오이와 오해 사이에서 오롯이 시들어가는 것이다.

 

 

 

 

 

 

 

점자(點字)로 기록한 천문서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

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

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

읽을 수 없는 서책이 하늘에 가득하다

종이도 아닌 것이 필묵도 아닌 것이

사계를 편찬하고 우주를 기록한다

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植字)해 놓았나

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

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

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

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

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

 

 

  

 

 

 

 

흰노랑민들레

 

 

 

투명 비닐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은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아이의 발밑에는 빗속을 뚫지 못한 나비가

날개를 접은 채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이따금 손등으로 콧물을 훔치며

살여울 쪽을 바라봅니다.

그때 바람칼을 그으며 새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새는 그렁그렁한 눈물방울을 뚫고

바동거리는 나비를 낚아채 날아갑니다.

흠칫 놀란 아이가 투명 비닐우산을 놓쳐버립니다.

 

아이의 엄마는 오 년째 한 곳만 보고 누워 있습니다.

아무도 아이에게 엄마의 병명을 말해준 적 없지만

엄마의 병은 돌아오지 않는 언니 때문이란 걸 압니다.

아이와 엄마 사이엔 언제나 언니가 있고 한숨이 있고

바닷속보다 깊은 슬픔이 흐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고 노란 약을 삼키는

엄마의 소원은 보리새우처럼 바짝 말라서

십 년만 더 늙어가는 것이랍니다.

그때쯤이면 다 자란 아이가 가벼워진 엄마를 물고

하늘 끝까지 훨훨 날 수 있을 테니까요.

 

길 건너 살구나무가 흔들리는 거로 보아

비바람이 또 불어오는 모양입니다.

슬픔은 형체가 없지만 흔들리는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의 아귀에서 빠져나간 투명 비닐우산이

지상에 등을 돌리고 둥둥 날아갑니다.

 

 

 

 

 

뻘밭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물음표 모양의 쇠갈고리를 들고

폐지 뭉치를 퍽퍽 찔러대는 그의 오른손은

의문투성이다

 

다섯 손가락 중 세 개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두 개는 엄지와 검지뿐이었다

검은 눈썹 아래 짙푸른 눈망울을 끔뻑이며

온종일 1톤 트럭에 폐지를 싣는 그의 손놀림은

뻘밭을 기어가는 게발 같았다

 

끼니때마다 그의 왼손에는 바다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마른기침을 할 때마다 파도는 넘실거렸다

가끔은 은빛 숟가락을 입에 문 게발이

펄펄 끓는 순두부 사발에 꼼지락거리다가

땡그랑 댕댕, 나동그라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붉은 노을이 제본소 바닥에 흩어졌다

 

모르겠어요 이제는 맵지 않아요

그의 혀끝은 이미 바다 건너 두고 온 맛과 키스와

달콤한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세 개의 손가락이 잘려나간 이후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방글라데시,

인도양의 푸른 파도가 제본기의 책갈피처럼

펄럭이며 밀려올 때면

그는 공장 한 귀퉁이 폐지 뭉치 위에서

낡은 지도책을 펴놓고

엄지와 검지로 바다의 거리를 재기도 하였다

 

 

 

 

 

 

 

안개주의보

 

 

 

안개의 제국엔 국경선이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백성은 없으므로, 한번 갇히면 누구도 헤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연유로 제국의 문은 열려 있고 천지간은 적막으로 가득 떠 있다. 어느 새벽 자전거를 탄 이국의 사내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간 적 있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고 차 있으나 차 있지 않은 그곳에서 꼼짝없이 여생을 갇혀 지내야 하는 일이 사람의 나라에선 외롭고 슬픈 일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흔하고 흔한 일, 아무도 자진 월경(越境)한 자의 행방은 수소문하지 않는다. 한번 삼키면 뱉을 줄 모르는 자본의 뱃속처럼 어둡고 컥컥한 길을 따라 그는 아직도 불 꺼진 공장 밖을 전전하고 있을까. ()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 무()를 무라 하면 무가 아니듯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 저 속절없이 자욱한 안개숲에는 더 이상 가지를 내밀 수 없는 나무들이 있다. 혼자인 듯 아닌 듯 아스라이 하늘을 괴고 서 있는 저것들을 사람들은 전신주라 부르지만, 안개의 제국에선 깃발 없는 만장(輓章)이라 부른다. 지난여름, 자전거를 타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말을 모른다.

 

 

 

 

     

  

 

묵지(墨池)

 

 

 

벼루의 가운데가 닳아 있다

움푹진 바닥에 먹물이 고여 있다

바람을 가르던 붓끝은 문밖을 향해 누웠고

막 피어난 풍란 한 촉 날숨에도 하늑인다

고요가 묵향을 문틈으로 나른다

문살에 비친 거미가 가부좌를 푼다

격자무늬 창문을 살며시 잦힌다

달을 품은 하늘은 한 장의 묵화

어둠 갈아 바른 허공에도 묵향이 퍼진다

지상의 화공이 붓을 들어 꽃을 그릴 때

천상의 화공은 여백만 칠했을 뿐

달을 그린 화공은 어디에 있는가

길 건너 미루나무 먹빛으로 촉촉하고

검푸른 들판 위에 연못이 잠잠하다

갈필(渴筆)로 그리다 만 한 생애만이

마음속 늪지에서 거친 숨 적시고 있다

 

 

 

    

 

 

 

 

약력

 

이용헌

 

광주(光州) 출생.

2007내일을 여는 작가등단.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가 있음.

도서출판 소울앤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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