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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자 외9편 / 곽경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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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7-19

 

▲     © 시인뉴스 Poem



갑골문자

 

곽경효

 

 

 

바닷가 모래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북의 등껍질

몸의 이미지는 사라져 버리고

선명한 육각형의 무늬만 남아 있다

천천히 걸어온 삶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제 몸에 새긴 암호가 아닐는지

그동안

바다도 땅도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느라

한 생이 저무는 줄 몰랐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해독하려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

지금 모래 위를 걷고 있는 나와

모래 속에 박혀 있던 거북의 시간을 생각한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함께 뒹굴고 있는

절대불멸의 이 아득한 공간을

 

몸이 삶의 일부분이라면

소멸은 또 얼마나 오랜 것인가

끝내 뼈 한 벌의 무게로 빛나고 있는

 

 

 

 

 

너라는 이름은

 

곽경효

 

 

 

당신 앞에 너라는 이름으로 서기 위해

나는 불면의 밤으로 숙성되어 왔다

 

매일매일 잠깐씩 당신을 생각했고

그리고 어김없이 저녁이 찾아왔다

당신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밤에

내 몸에는 가시가 돋았다

당신이 가시에 찔리는 불온한 상상을 했고

잊고 싶은 기억과 잊을 수 없는 기억 사이에서

갈팡질팡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불면의 밤을 견디는 동안

어느 사이 당신의 이름은 맹목(盲目)이 되었다

나는 다시 너에게로 출렁인다

 

생각해보니

너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말의 입

 

곽경효

 

 

1.

내가 쓴 말이 나를 지우기도 한다

가끔은 다시 쓰고 싶은 말도 있다

 

2.

저수지의 고요한 수면 위를 차고 오르는 새떼들

반짝! 햇살이 날개에 실려 날아간다

가벼운 몸의 언어들이 촘촘히 얽혀

아무런 수식이나 설명도 없이

높은 하늘을 아찔하게 흔들어 놓는다

나는 단숨에 한 무리의 문장을 읽는다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누가 저토록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을까

새들이 나를 끌고 간다

이제까지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말의 입 속으로

 

 

 

 

    

 

모래바람

곽경효

 

 

 

 

 

오랫동안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을 뚫고 지나간 바람은

한 번도 제 몸을 보여 준 적이 없다

맨땅에 수많은 실금을 그어놓았을 뿐

물 위에

발자국 위에

 

어둠의 통점을 가지고 있는 나무는

썩지 않는 뿌리를 가졌다

꽃 피우지 못해

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다 해도

잎사귀 뒤에 또 한 잎

제 상처를 놓아두고

 

들리는가

슬픔의 밑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소통

 

곽경효

 

 

 

 

대합탕을 끓인다

날선 칼을 들이대도 꿈쩍 않던 몸이

한순간 허욕의 불길 앞에 쩍-

제 속을 다 보여준다

단숨에 풀어버리는 몸의 결박

소통이란 저토록 쉬운 것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몸에 집착했으므로

어느 것에도 가까이 가지 못했다

차라리 거짓말 같은 희망을

쾅쾅 내리쳐 부수고 싶었을 뿐

모래알처럼 바스락거리는

불면의 밤이 몇 번

또 슬픔에 매달려 한나절

 

어느 사이 사막의 바람처럼

더운 체온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갇혀 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서

허공에 날려 보낸다

 

한 조각의 뼈도 남지 않은 내 속살

 

 

 

 

 

 

 

아집을 깨물다

 

곽경효

 

 

 

 

호두를 깨트려보니

통통한 벌레 한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견고하다고 믿어온 세상에도 빈틈이 있었으니

 

내 욕망은 빈 배와 같아서

껍데기를 뚫고 들어 온 네가

내 속살을 갉아 먹는 동안

자주 덜거덕거렸다

 

단단하지 못했던 날들이다

눈 앞의 풍경에다 빗장을 걸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또 다른 세계를 슬어놓은 줄도 모른 채

 

신념이라는 것 부르지 않아도 온다

 

말없이 고요한 순간에

불현듯

뒷덜미를 낚아채듯이

 

 

 

 

      

 

 

자작나무, 흰 뼈로 서다

 

곽경효

 

 

 

그 숲에 들어서니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켠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온몸으로 불을 밝히고 있다

 

침묵으로 견뎌온 시간의 눈금이 저리 곧은가

 

세상의 꽃들이 꿈처럼 피었다 지고

바람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또 밀려간다

깃발처럼 흔들리는 이파리는

곧 지워지고 말 생의 한 부분일 뿐

 

나무에 새겨진 무늬를 바라본다

환하게 꽃피는 생애 가지지 못했으나

꺾이지 않는 한 줄기 등뼈를 지녔으니

 

마음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으려

제 몸의 서슬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마른 네 뼈마디,

 

적막한 자리에서 홀로 깊어지는 사랑아

 

 

 

 

 

 

적소에 들다

 

곽경효

 

 

 

오랫동안 내 안에서 떠돌던 것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득한 언어의 그림자

 

나무 한 그루가 한 나라와 같다면

수많은 나무가 뿌리내린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요새인가

 

대숲에 가서 보았다

침묵과 절정 사이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수천수만의 칼

 

저 곧고 푸른 것이 정신이라니

잘 벼린 문장 하나 붙잡고

가슴을 스윽 베이고 싶다

피 흐르는,

내 몸이 꽃으로 피는 독

천 년 후에도

 

 

 

 

   

 

 

존재의 이유

 

곽경효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차마 나를 버릴 수 없어

마음을 버렸다

 

당신, 어느새 내 심장을 쏘았는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혀

바르르 떨고 있는 날카로운 기억들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으로 통증이 번져간다

 

의심했어야 했다

마음의 행방을 물었어야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천 년 동안의 내 기다림

 

 

 

 

 

 

중독

 

곽경효

 

 

 

말 보다 먼저 목이 메일 때가 있다

 

지독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

이별을 하는 것이라고

그 사람이 돌아서 간다

절정의 순간,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가

하지만

순간이라는 말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막무가내의 슬픔이다

내 이별에는 눈물이 없다

젖었다가 이내 마르는 가벼운 몸을 가졌을 뿐

이제 난 네 몸짓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슴팍을 꽉 깨물고 놓지 않는 말의 턱뼈

그것이 너의 이름이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라는

 

 

 

 

    

 

곽경효 2005<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달의 정원

한국시인협회원, 계간 디카시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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