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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위외 9편 / 주병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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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6-23

 

▲     © 시인뉴스 Poem



머위

 

주병율   

 

마당에서 머위를 키우기 시작한 지도 삼 년이 지났다

무엇을 키우고 기르며 산다는 세월이란

헝클어진 솜털뭉치와 같아서

내가 사연 많은 그의 시간이 된다는 것인데

가끔씩 황호색비단벌레가 울음을 우는 밤이면

한 뼘 머위대의 가는 허리가 더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눈빛은 주검을 바라볼 때처럼 깊어져서

성긴 울음의 빈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곤 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은 비늘처럼 생긴 포()들에 싸인 꽃대 위에서

하나하나의 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한때는 꽃의 부드러운 손에 들렸던 밀서 같은 비밀에 기대어 나도

장식의 말발굽 아래 새긴 헛된 요령을 흔들며

저 울음의 내력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는 말도 모른 채

내 마른기침의 내력을 용서하기만 하였다

머지않아 무연히 닥칠 부음처럼 바람은 차고

마당에서 황호색비단벌레의 울음도 잦아질 것인데

밤마다 머위의 어둔 물관을 들추면

단사(丹砂)로 맺혀 거기 속이 까맣게 타버린 비바람도

눈보라도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

 

주병율


용서하게
겨울 하늘을 무연(憮緣)히 휘날리는 하얀 눈들을 용서하게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너에게 전화를 하는 나도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 앞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낡은 포장마차 안 과수댁이 쳐주는 소주잔으로 앉아서
힘이 든다고, 힘이 든다고 말하는 이 미친 겨울바람도 용서하게
살다보면 때로는 저렇게 굽은 느티나무 등걸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가끔씩 서로가 따뜻해지는 날이 있다고
대낮부터 불콰하게 젖어서 눈밭에 붉게 갈대로 눕는 과수댁도 용서하게
십 년을 혼자 모질게 버티고도 아직 굽은 마음이 있어서
검게 갯벌로 흐르는 저 진눈깨비 같은 눈물도 용서하게
만경(灣景)이 만경(晩景)으로 맺혀서 불덩어리로 눕던 바다
나는 아직 그 바다의 만경(晩景)을 마저 건너지 못하고
작은 등 하나 기댈 곳 없이 사락거리며 눈이 내리는 저녁
굽은 등으로 누워서 잠들 수 없었던 밤도 용서하게
갈 곳도 없이 헤매던 너의 지난밤도 다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앞 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아직도 무연(憮緣)히 휘날리며 붉은 눈발이 되어 내리는 나에게
너무 늦게 도착하던 시간도 용서하게
짧은 유서도 끝내지 못하고
사랑한 마음을 용서하게
이 추운 겨울을 용서하게

 

 

      

 

 

빙어

주병률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 김춘수 뭉크의 두 폭의 그림중에서

 

 

      

 

 

 

이별

 

주병율

 

 

겨울 벚나무 아래서 이별을 했다.

그 남자 너무 오래 서서 울었다.

강둑에 기댄 마른 갈대의 아랫도리는 붉고

강물은 덤벙덤벙 깊이를 알 수 없이 흘러갔다.

빙하의 얼음판을 조심스레 건너왔던

지난 시간도 함께 몇 장의 붉은 나뭇잎으로 흘러갔다.

흘러가면서 그것들은 서로 얼음이 되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얼음의 흐느낌도 마저 듣지 못하고

밤은 이미 너무 깊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 가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사람의 마을로 가는 길은 모두 모래가 되었다.

 

 

 

      

 

 

 

저녁에

주병율

 

 

 

저렇게 안개가 많은 곳에서

 

숲은 나무 사이사이가 모두 묘지인데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은 수행자처럼

 

나무들은 늙어서 어린나무로 새로 돋고

 

 

오늘 저녁에는

 

가만 가만히

 

떨어지는 꽃들이

 

어둡고 캄캄한 저녁 먼 패랭이꽃밭을 지나간다

 

 

 

    

 

 

 

숭어

 

주병율

 

 

지난겨울에도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어두워지는 포구의 뱃전에 앉거나 기대어서 귀기울여 보지만

 

삼남 천지에 네가 왔다간 소리는 듣지 못했네

 

먼 바다를 건너와 하루 종일 내리던 눈보라 속

 

아직도 젖은 하늘에 길이 있다면

 

지워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은종이 같은 비늘 하나

 

이제 어디로 가랴고 내게 다그쳐 부는 바람만 곁에 있어서

 

지난겨울에도 여전히 나는 바다의 숭어를 사랑하고

 

눈이 멀었네

 

 

 

 

      

 

지금

 

주병율

 

 

누가 찾거든

어제 저녁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가

나는 잔다고 해라

어제는 가고

내일은 아직 여기 없으니

 

누가 찾거든

옛날 방에서

아주 잔다고 해라

 

 

 

 

 

 

지리산4

 

주병율

 

 

꽃피는 봄에

배추꽃 노란 꽃잎 뒤로

새 한 마리 아스라이 파묻히는

하늘을 보다가

기다리는 사람없이

홀로 저무는

외딴집

 

 

 

      

 

 

고염나무

주병율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마른 잎에 난 구멍

구멍 속의 상처가

내 집이다.

바람만 불어도 말라서

더 이상 마를 것이 없는

구멍

구멍 속의

바람이 내 집이다.

내 집은 말이 없다.

밑이 없어서 흔들리고

흔들려서 더 흔들리고

흔들려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우체부도

새들도

거미도

흔들려서 그 집엔

아무도 세들어 살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영혼도 머물지 않고

묘지 위에서도 자라지 않는

바람의 집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간다는 것

주병율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뒷목에 까슬거리며 달라붙은

먼지도 탈탈 털어 버리고

가방도 버리고

구두도 버린다는 것

 

오전 10시에 죄다 닫혀버린

대문과 창문을

대낮에 남아서 빈둥거리는 먼지와 뱃볕을

버리고

잊는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서

분별도 없이 웃자란 자신을

비워간다는 것

 

서른 지나 마흔을

삿된 마음을

버린다는 것

 

길이 없는 밤에도

타박타박 말없이

또 하나 길이 된다는 것

 

 

 

 

 

 

 

 

오후의 잠/주병율

 

 

오후에는 잤다.

법이고

규칙이고

생활이고

아이

마누라

밥통

시달림

죽은 꽃

나발이고 잊고

잤따.

지하실과

시멘트와

벽과

피뢰침이 꽂힌 옥상을

옥상에서 쏟아지던 햇볕을 잊기 위해

흐린 기억을 끼고 잤다.

이제 희망 따위는 없다.

기다림과

외로움과

슬픔 따위도 없다.

문학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술에 취한 정신병자도 없다.

파게와

구원과

지옥 천당도 없고

열반도 없다.

집과

네모난 방과

벽에 박힌 못과

바퀴벌레와

흔들리는 옷걸이를 잊고

백치같은 해는 종일을 타는데

더 이상 시들지 않기 위해

오후에는

잤다.

 

 

 

 

 

 

 

주병율 약력

 

경북 경주 출생

92<현대시>등단

시집<빙어>

시 엮음집<마흔,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현재. 도서출판<생각과표현>대표

<Moment>발행인 및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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