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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는 당신의 등을 쓸며 / 민왕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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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6-09

 

▲     © 시인뉴스 Poem

 

▲     ©시인뉴스 Poem

 

 

뒤척이는 당신의 등을 쓸며

 

 

 

잠을 부르기 위해 여자의 등을 쓸어주며

 

나는 오래전 죽은 당신의 어머니가

뒤척이는 어린 것을 다독이던 태고의 손이 될 수 있다

 

어깻죽지부터 허리까지 불안을 비로 다 쓸어내리듯이

 

너의 등을 쓸어주는 일이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해왔던 가장 선한 일 같다

 

세상에 어느 마당이든 그곳을 조심이 쓸고 있는 사람은

낙엽 하나까지 달래어

빈 곳 언저리로 슬며시 밀어두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녔다

 

세상은 등을 쓸 듯 사는 것이라고

겨우 잠든 여자의 등이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해칠 수 없는 손이 되어 보는 밤

 

등을 쓸며, 문득 나는 내 안까지 쓸어내 텅 비어버린

마당이 되어있는 것만 같다

 

 

 

 

 

 

저녁마다 무사가 되어

 

 

 

마늘과 파 당근 상추의 끄트머리, 돼지목살의 가장 두툼하고 맛 좋은 곳을 잘랐던 칼

 

갖은양념이 배인 부엌칼은 한 집에 하나씩 있고

 

몸살 난 당신을 기다리며 나는 내게 하나뿐인 칼을 물에 삶고 있습니다

 

칼을 드는 저녁마다 무사가 되어

동물의 뼈를 도리고 식물의 관절을 부드럽게 잘랐습니다

 

무슨 맛이 날지, 귀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칼을 삶으며

 

여기선 지난 계절, 당신과 내가 해 먹었던 수많은 요리의 맛이 날 겁니다

 

이를테면 당신이 내게 해주었던 닭볶음탕, 비리고 매콤한 것을 소주와 함께 마시면서

황홀해진 나는 연립주택 담장에 핀 장미를 따러 갔습니다

 

오늘 칼을 삶으니, 꽃 냄새가 납니다

 

무엇을 자르기만 했던 칼을 삶으니, 칼이 잘라냈던 무엇들이 우러납니다

 

칼은 수많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잘랐겠지요 그리고 가끔은 마음도 잘랐을 겁니다

 

당신이 아플 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이 칼을 삶아 같이 먹읍시다

 

칼을 삶으며, 잊었던 아침과 저녁을 데려다 놓겠습니다

오월의 담장에 핀 피 같은 꽃을 따다 놓겠습니다

 

 

 

민왕기

 

1978년 춘천에서 출생했다. 단국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2015<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아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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