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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골짜기 / 이혜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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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기자
기사입력 2019-05-05

 

▲     © 시인뉴스 Poem



재의 골짜기

 

 

 

서로를 헤집던 눈빛이 진창으로 고일 때 네가 선물한 골짜기에 누워 깊숙한 윤곽을 얻는다 먼 곳에서 그을음을 퍼다가 쏟아놓고 사라진 사람, 흉한 마음을 모아둔 유곡으로 들어서면 검은 꽃과 삭은 과일들이 가득했지

 

어스름을 뒤집어 여명을 꺼내면 그림자는 얇고 허망한 대륙, 그 우울한 영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라앉는 골짜기마다 환한 어둠들이 차올랐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워 깨어져야만 안심이 되는 유리잔 같았지

 

가시덤불로 반지를 엮어 손가락에 나눠 끼우고 과분한 깊이를 선물받았다 다정한 너를 오려내어 그 테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싶다 열쇠구멍처럼, 비밀을 속삭이는 입모양처럼, 뚫린 곳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이마에 역청을 묻혀가며 간신히 지어 얻은 그림자는 한 생을 닳도록 입어야 하는 누추한 겉옷이 되었지 타다 남은 고백들로 이루어진 골짜기 속에서, 재 속에 눕는 것이 불 위를 뛰노는 것보다 행복하였다

 

 

 

 

 

멀어지는 포도

 

 

 

리코더를 불 때 왜 눈을 감을까

 

눈도 구멍이니까

 

우리는 어쩐지 기다리거나 사라지고 싶어서

수없이 많은 손가락들을 꺼내놓는다

 

서로의 구멍을 틀어막으며

한 뼘 더 다정해지고 싶어서

 

모아진 눈으로

오므린 입술로

 

왜 키스할 때 눈을 감을까

연주되는 중이니까

 

몸속에 숨을 초대하여

새어나가는 음악이 되어주려고

 

속으로 맺혀가는

물방울들, 가지마다 매달리는

흐린 기포들

 

어둠과 빛 사이

눈을 감으면 시들어 떨어지는

 

숨방울

 

멀어지는 중이니까

음악으로부터, 넝쿨을 뻗는 혀들로부터

 

부풀어오르다 펼쳐지는

어두운 열매들

 

 

 

 

 

드림캐쳐

 

 

 

엮인 꿈들의 정원

팔월, 이라 말하고 이를 닦았다. 더러운 이름들을 입에 물고 지나는 계절이었다. 여러 번 헹궈 말린 꿈속에서도 곰팡이 낀 커튼이 만져졌다. 놓쳐버린 비밀들이 모여 처음 보는 식물로 자라날 때, 불길한 모양의 수를 놓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모를수록 아름다워지는 일들의 목록을 베게 밑에 괴어두고서.

 

안팎

방이 차곡차곡 접혀 빛의 서랍장으로 들어가면 가느다란 틈 사이에서 커다란 눈이 잠든 나를 지켜보았다. 흰 눈동자에 검은자위를 가진 아름다운 눈이었다.

 

금기들

커피를 마실 때 불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차가운 음식을 나눠 먹으면 하루가 나쁘다

무늬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잠들면 밤에 헤매게 된다

꿈에 화살을 맞고 아침에 머리를 묶으면 안 된다

검은 것을 만지며 먼 곳을 바라보면 흉하다

 

흰 뱀

입가가 잿빛으로 물드는 저녁이면 눈꺼풀은 오래 써 닿고 헤진 주머니처럼 바닥을 잃어버리게 했다. 입에 올린다는 말은 입술을 베인다는 말이었고, 꿈은 낮으로부터 이염된 이야기들로 얼룩졌다. 잠든 입술에 올려둔 단어들이 허물을 벗고 서서히 구겨지며 죽어갔다.

 

검은 깃털

잠에서 깨면 눈을 씻었다

얼굴을 닦은 수건 위로 속눈썹이 그물처럼 자라났다

악몽과 쓸모 사이를 누비던 날개였다

 

 

 

 

 

홀로그래피

 

 

 

겨울이 복용한 가루약들이 서서히 헐거워지는 새벽입니다. 크게 앓고 일어나 창의 뒷면을 바라보면 빛으로 다 스며들지 못했던 무늬들이 떠오르는군요. 실수로 삼켜 버렸던 눈보라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지를 꺾는 번개들. 자신 안의 망령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의 여행. 흐르는 것이 흐르는 것을 더럽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금 간 접시 위로 돋아나던 작은 손가락들을 보았지요. 구름 속을 떠다니던 태아의 형상, 뒤늦은 감정처럼 흘러내리던 물방울과, 비둘기 날개의 다채로움도요. 하늘에 떠올랐던 폭풍의 무늬가 살 속으로 드리울 때, 오래 버려둔 어깨 위로 차가운 광선들이 쏟아집니다. 가루약이 빠르게 몸속에서 무수해지듯 우리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 것을 알지요. 창문 위에 적어두었던 소식들이 서서히 휘발하고 세계의 한 귀퉁이가 접혀듭니다. 사랑하는 헛것들. 빛의 자격을 얻어 잠시의 굴절을 겪을 때, 반짝인다는 말은 그저 각도와 연관된 믿음에 불과해집니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향해 취한 눈을 비비며 나아갈 수 있을 테지요. 두 눈이 마주칠 때 생겨나는 무한의 통로 속으로. 빠져든다는 말 속에 이미 깊숙해져 있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찾아. 떠올린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일렁임을 다해서.

 

 

 

 

 

매직 아이

 

 

 

종이 속에 계단을 숨겨 놓으면

점점 깊숙해지는 걸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비쳐 보이고

 

동굴 속으로 낯선 강이 흘러

우리는 먼 눈을 가지기로 했다

 

동공 속은

우리가 가장 깊숙이 들어가 본 동굴

이미 투명한 종유석과 석주들로 뒤얽혀 있었지

 

감은 눈 너머로 흩뿌려지는

색색의 어둠처럼

 

굴절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돌의 오랜 파문처럼

 

깊숙이 흐려져 본 사람만이

아름다운 입체를 가질 수 있다고

 

숨겨두었던 표정들을 꺼내 펼쳐 보이며

찰나의 광년 속을 우리는 지나왔다

 

잠겨드는 동굴의 페이지를 넘기며

서로의 눈 속을 걸으며

 

처음 보는 무늬들을 지어 가진 순간이었다

 

 

 

 

시간의 세 가지 형태

 

 

 

화살표

밤은 너를 모른다. 그늘진 자리에 들어서면 날 선 검정들이 다투어 몸을 관통했고. 스쳐간 것들을 되뇌이면 입술은 뜨거운 상처의 자리가 되었다. 떠나간 이름에는 소량의 독성이 있어 부르는 자를 서서히 멍들게 하고. 쉽게 물드는 소매를 가져 몸의 방향을 들킬 때, 발자국들은 머뭇거리며 멀리로 사라져갔다. 달이 서서히 얼룩지는 절기였다. 갈라지는 잎사귀들의 무늬로, 목마른 것들이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쓰러지는 것만이 이 오래된 이야기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채찍

마음이 내쳐진 자리마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자라났다. 폭풍 앞에서 병드는 나무와, 상하고 썩는 바람과 사람. 잠시의 아픔에도 소리와 리듬이 있어 파고들수록 기이한 소리를 내던 궤적들도 있었지. 그러니 사람은 어설픈 악기. 불안이 잠시 연주하다 내버리는 완구. 귀를 기울이면 순간들이 차례로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려.

 

달은 실패했다. 구해줘. 사라지기 전에. 모든 것을 모르기 전에. 두려움이 모든 것을 저버리게 했고. 그날의 그믐달이 빠져든 곳은 영원이라 부를 만한 장소가 아니었지. 끝까지 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익숙한 어둠이 찾아올 텐데. 오직 끝없이 잠겨가는 너만이 차갑고 텅 빈 이 밤을 알아본다.

 

 

 

 

슈가 포인트

 

 

여보, 눈동자가 얼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달콤해지려 했는데

달아질수록 더러워지고

시끄럽게 시무룩해져.

 

느리게 검게 검고 느리게

점점 더 나를 모르게 돼.

 

꽃 대신 칼로 이루어진

꽃다발을 선물받은 것 같아.

 

얼룩을 지어 얻은 얼굴로

입을 벌리고

부엌을 온통 끈적한 액체로 더럽히고

 

점점 더 눈빛을 버리게 돼.

 

두 발이 타오르는 것 같아, 여보.

 

다른 이의 생각들을 받아 마셔야 할 것 같아.

모르는 이름을 부르며 잠들어야 할 것 같아.

 

저녁이 오면

나는 봐.

 

앙금과 검불과 연기들이

길게

아주 달게

서서히 내 몸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사라진 입술과 두 개의 이야기

-진주에게

 

 

 

근심어린 이름을 물고 조개는 바다를 건너간다

 

조개는 사실 바다의 새였지

하나라 여겼던 날개가 둘로 나뉘면

보석인 줄도 몰랐던 비참이 눈을 뜬다

 

두려운 날개를 단단히 접고

상처받을 준비가 된 입술로

깃털 속에 숨겨두었던 날카로움으로

 

조금씩 몸을 얻어가는

풍등처럼

 

맺힌 잠시의 연결됨을 매혹이라 부른다지만

더 큰 영롱과 황홀이

헤어진 몸의 안쪽에 고루 발렸다

 

풍등이 소원의 힘으로 인간의 별이 되듯이

너에게도 타오르는 슬픔의 검불이 있어서

 

비참을 껴안으며 조개는 날아오르고

마음에도 단단한 껍질을 심어두려
한 쪽 날개를 버려가며

수면을 향해 몸을 열었다

 

날개를 두고 왔다 해서 하늘을 버린 건 아니지

 

흉 진 자리에 은근한 파문이 고여들듯

하나의 품을 떠나보낸 조개가

빛나는 그릇이 되어 바다를 안듯이


귀한 구슬이 입으로 잠겨드니

세계의 안쪽이 사랑으로 그득해진다

 

포옹의 넓이가 조금씩 부풀어갈 때

뜨겁고 환한 바다의 입술이 되어

한껏 가벼워지겠지

하나이자 둘인 몸으로 나아가겠지

 

멀어짐으로서 완성되는

빛의 자리로

 

 

 

 

 

종이를 만지는 사람

 

 

 

당신은 지나치게 조심히 걷는군요.

나무를 꿈꾸게 하려고.

 

오늘의 이면지들이 숲의 어깨 위에 엉켜 있네요. 지나오는 동안 보셨겠지요. 폭설에 물든 흑목련 나무가 바닥에 새까만 꽃잎들을 엎질러둔 것을. 그건 잠시의 망설임이 담긴 문장입니다.

 

차이와

간격에 대한.

 

나무가 눈멀어 자신만의 어둠 속에 잠겼다지만, 그는 잎사귀의 눈꺼풀과 내뻗은 가지로 세계를 다시 얻지요.눈송이가 우리의 손끝에서 태어나듯이.

 

저녁을 천천히 더듬으면 낯익은 별들이 떠오르고… … … … 한 번의 스침으로도 생겨나는 마음의 요철들. 그 짤막한 배열의 모스부호들을 건져내려 눈을 감습니다. 나무의 속내까지 몰려드는 새로움을 흰 점자들로 이루어진 백지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흑목련의 기억을 일깨우는 지금, 당신은 종이를 만지는 사람입니다. 종이에게 경험을 주려 오래도록 걷는 사람입니다.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던 나무의 기억들이 갈피마다 쏟아지네요.

 

정든 파본처럼.

 

 

 

 

 

우리는 아마도 이런 산책을

 

 

 

개를 돌려보내고 해변을 걸었다

발자국은 수없이 자신을 벗어나고

 

등대까지만 가 볼까

 

말을 지으려면 혀 밑의 안개부터 거두어야죠

가볍게 웃기만 해도

해안선이 흐린 것들로 뒤덮였다

 

발목이 흠뻑 젖은 외눈의 거인

등대에게 사람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깜빡이며 흔들리며 피어오르며

여러 밤을 애써 켜들겠지

 

여기부턴 더 이상 길이 없네요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서야

완성되는 장면들이 있어서

비밀은 빛 없이도 가장 환하고

 

왜 좀 더 미리 눈치 채지 못했나

저 개는 우리의 배후를 알아서

신이 목소리를 묶어둔 것을

 

등대에서 개로 해변에서 인간으로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인간의 산책길을 수놓는 물방울들

멀리서

흰 개가 짖는다

 

파도가 높으니 조심해

 

이야기하자 눈앞이 흐려졌다

개의 오래된 기억들이 치솟아올랐다

 

 

 

 

 

 

이혜미.

2006<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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