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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 내리는 비에 젖다 / 변종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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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제 기자
기사입력 2019-04-23

 


저쪽에 내리는 비에 젖다

 

 

잘못 내린 정류장

 

세 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보았습니다

 

늙은 능소화가 힘겹게 울타리를 넘고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철조망 너머

 

꼬리 잘린 도베르만이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낯선 땅에 이민 온 표정으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짝짝이 슬리퍼를 신은 여자가 유모차를 밀고 갑니다

 

움푹 파인 도로에 빗물이 고여 있습니다

 

능소화가 웅덩이 쪽으로 손나팔을 붑니다

 

붉은 자동차가 세 바퀴로 굴러갑니다

 

휘청이는 유월이 도로 위에 울퉁거립니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 붉은 담장을 넘어갑니다

 

비를 맞으면서 비를 맞지 않으면서

 

 

 

 

 

 

 

 

 

 

,

 

 

양복 안감 솔기에 실밥 하나가 늘어져 있다. 담뱃불로 툭, 끊어낸다. 네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간다. 떨어진 자리에 툭, 장미가 핀다. , 던진 붉은 한 마디에 여름이 온다. 여름이 과속방지턱을 넘으면 여드렛달이 진다. 달그림자 뒤편으로 매미 소리가 툭, 떨어진다. 아니 내 귀에는 툭, 툭 떨어져나간 네 목소리만 들린다. 골목은 휘어져 툭, 툭 끊어지는 인연들, 하필이면 그때 담배 생각이 툭, 떨어져나가는 담뱃재 너머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온다. , , 빗방울이 어깨를 건드린다. 참았던 울음의 솔기가 뜯어지기 시작한다. 와르르 계절이 무너지고 있다. ,

 

 

 

 

 

 

 

 

 

 

새는 화분처럼 조잘거리고

 

 

점심시간 직전 수업시간. 아이들에게 독서를 시킨다.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바스락, 책상도 의자도 입을 다물고, 난데없이 14번 아이의 의자 옹이에서 새가 운다. 누구야? 말하는 거?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다시 5번 아이 책상의 나이테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22번의 책 귀퉁이에서 새순이 돋는다. 29189순식간에 천장까지 자란다. 7번 아이 의자의 등받이에서도 새가 운다이 녀석들진짜 혼나야 조용히 할래아무리 목청을 돋워도 새, 소리 그치질 않는다아이들은 그저 묵묵히 책장만 넘기고 있다유리창 밖에는 구름이 떠가고 교실에 심어진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새소리가 들린다조용히 해조용히 하란 말이야아무리 소리 질러도 교실은 새, 소리만 가득하다.

 

 

 

 

 

 

 

 

 

 

 

괄호의 시간

 

 

터널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투발루는 어디에 있나. 내 몸엔 죄가 흐르고 있어, 유목의 피가 흐르고 있어. 백색의 태양이 새들의 머리를 빨갛게 달구는 노을. 바다 복판 한 무더기의 양떼들, 영영 집으로 갈 수 있을까. 투발루는 어디에 있나. 비행을 포기한 새들의 이름을 조류(鳥類)의 명부에서 지워내면, 씻기지 않는 유목의 냄새, 해조음 울리는 투발루는 어디에 있나, 투발루는 투발루, 가라앉는 흔적들 따라서, 투발루는 어디에 있나. 바다 양떼의 울음이 터널 속에서 들려오는 시간, 우우우 내 안에 쌓인 돌멩이들 늙은 돌탑이 혼자서 빈 기둥 어루만지며 어깨 들썩인다. 시름시름 엉켜 자란 잡초들 끊어진 사랑이 찾아와 서성이는.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헤아리다가

잊었다. 네가 오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젖는다. 우산을 쓰고 방안에 누워

고민한다. 빗물 사이로 수많은 꽃잎들

쏟아진다.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빗금들

선은 원래 소리가 없는 것인데

비가 소리를 만나 지붕을 만들고

내게로 와서 이렇게 요란한 그림자를 만든다.

실금이 간다. 통증에서 비롯되어 내게 박힌 것들이

구름이 된다. 잠은 이미 구만 리

사선으로 내린 것들이 그 먼 시간으로부터 달려와

나를 감싼다. 불면은 불면 날아갈 듯한

민들레 씨앗, 한밤의 몽정처럼 날리다가 거기

우산을 쓰고 창문 앞에 있는 구름

비에 씻길수록 환해지는 잠,

달아나는 발자국 소리

밤새 새까만 도화지에 빗금을 그리던 빗살이

창가에 걸터앉아 기다리다가

우지끈 부러지는

.

 

 

 

 

 

 

 

 

 

 

 

배꼽에서 잠들다

 

 

햇살이 잠깐 뜨겁다. 분꽃은 다홍으로 피어나고.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은 가을은 구멍 난 주머니로 스며드는데, 어디로 가는 거니. 떠나버린 그녀의 왼쪽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헤아린다. 우스워, 동전의 크기를 가늠하다가 숫자를 잊어버리거나, 숫자를 헤아리다가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 일, 우스워, 어디로 가는 거니, 꿀벌의 가슴 근육을 가늠해 본다. 다시 햇살의 결을 따라 꿀벌이 날아든다. 라파누이*로 갈 거야. 그녀가 떠난 뒤에도 분꽃은 진한 다홍으로 피어나고,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분꽃의 씨앗, 까아만 라파누이의 밤을 떠올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 초록으로 살아가는 원주민의 배꼽을 닮은, 라파누이로 갈 거야. 가슴 근육을 키울 거야, 머나먼 비행을 위해. 햇살은 뜨겁고, 분꽃은 다홍으로 피는데, 라파누이로 갈 거야. 주머니의 동전을 헤아리는 일은 여전히 어려워.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겨울.

 

 

* 라파누이(Rapa Nui) : 칠레 령 이스터 섬을 원주민들은 커다란 땅을 의미하는 라파누이라고 부른다.

 

 

 

 

 

 

 

 

 

 

 

 

클림트 속에서

 

 

점으로 선으로 물감으로 동영상 말고 정지된 이미지로 딱 그 순간 멈춘 그 순간만큼만 움직이지 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점으로 선으로 사라바렐리스의 비튄더라인스*가 흘러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행과 행 사이가 색깔로 펄럭이는 가을 그녀는 끊임없이 노래하고……기억은 잔인하죠…… 더 좋을 수도 있는 시간을 배경으로 깔고 공간적 배경은 아지 못할 먼 이국의 낙엽 지는 공원쯤으로 꿈에도 몰랐던 그녀와 큼지막한 낙엽이 떨어지는 공원 벤치 그 옆에 반나(半裸)의 여인이 바보처럼 생긴 강아지 한 마리 끌고 지나고 점으로 선으로 색으로 떨어지는 순간 입을 맞춘 채 얼어서 얼어붙어서……기억은 잔인하죠……한 소절에서만 도돌이표 황금빛으로 빛나는 키스는 딱 그 지점에서 다시 도돌이표 무한 반복 점으로 선으로 금으로 울리는……기억은 잔인하죠……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점으로 선으로 숨이 멎을 듯한 침묵으로

 

* Sara Beth Bareilles가 부른 노래, “Between the Lines”

 

 

 

 

 

 

 

 

 

 

 

국수라는 말에는 수국이 핀다

 

 

열무국수에 파랗게 질리는 소용돌이, 누가 휘휘거리나, 누가 수군거리나, 국수 그릇에서 수국이 피어난다. 파리한 국물을 들이켜고 국수라는 말을 입안에서 우물거리면 수십 개의 다발로 피어나는 수국. 필 때부터 질 때까지 색을 갈아입는, 우리의 관계도 저러한지. 의식의 변두리에 피어나는 수국 무더기. 너와 걷던 둘레길가 반그늘에서 자라던 수국은 어쩌다 국수그릇으로 옮겨 핀 걸까. 국수와 수국이라는 시니피앙만 한 입 우물거린다. 아직 지지 못한 가화(假花) 송이가 파리하게 고명으로 떠 있다. 국숫발 끝에서 피어나는 수국, 수국 값 얼마예요?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과도로 사과를 깎는다. 풋사과의 껍질이 두껍다. 여보세요?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가 울리다 끊어진다. 파란 껍질이 깎이다가 툭, 끊어진다. 여보세요? 맥락 없이 울리는 전화와 까닭 없이 끊기는 사과껍질. 천천히 껍질을 벗는 사과와 벗기는 손. 수화기 안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 여보세요? 사과를 깎고 나면 몇 조각으로 나눌 건가요? 다시 끊기는 사과 껍질. 다시 끊기는 전화. 북반구에서 시작한 칼질이 남반구에 이를 즈음, 여보세요? 당신은 저와 같은 조각에 계실 건가요? 다시 끊기는 사과껍질. 다시 끊기는 전화. 과도가 적도(赤道)를 지날 즈음, 끈적해지는 손가락, 여보세요? 사과를 가른 다음에 저랑 같은 조각에 계실 건가요? 무딘 과도는 위험해요. 여보세요? 손가락 베이지 않게 조심하라구요. 껍질 벗는 지구, 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너와 나 사이를 지나는 칼날. 지구의 반대편에서 걸려오는 전화, 여보세요? 끊기는 사과껍질, 하얀 속살이 드러난 지구, 너의 하얀 목소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담뱃갑 위의 목캔디

 

 

연립주택 현관 앞 제비집, 단음절로 세상을 읽어가는 제비새끼들을 두고 어머니 어디로 가셨나. 난데없이 소리소리 지르는 옆집 사나운 개, 제법 세상을 살았노라 줄줄 문장으로 짖어대는. 포크레인이 헤집어 놓은 건너편 언덕바지, 수많은 개미굴에 스미는 햇살. 일요일마저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두 달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 짓다만 집은 언제 짓나. 자욱하게 불어대는 미세연기, 케케한 목젖은 풀리지 않고,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오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문장이 되지 못하는 울음, 꿈과 먼지의 나날들. 재개발 바람에 위태로운 현관, 짖어야할 때 짖을 수 없는 아침 안개,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나.

 

 

 

 

 

 

 

 

 

변종태  시인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안티를 위하여미친 닭을 위한 변명

제주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 계간문예 다층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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