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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의 숲 / 하상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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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제 기자
기사입력 2019-04-11

 

 

잠언의 숲

 

 

왓 프라싱에는 잠언의 숲이 있다

 

- 네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

 

이 잠언이 나를 울린다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가족끼리 모여 잡담을 하는 사람과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사람과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무마다 적힌 잠언을 수첩에 옮기며 되뇐다

 

다섯 시가 되자 승려가 나와서 종을 쳤다 불경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자 아래에서 반쯤 눈을 뜬 채 개가 졸고 있었다 개같이 생겼다고 하면 귀엽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서양 사람들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 뿌려 놓은 밥을 작은 새가 날아와 쪼았다 그리고 조금 더 큰 새가 땅에서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글을 쓰다가 볼펜이 다 되었다 어떤 벌레가 다리에 난 상처에 앉아 살에서 나오는 물을 빨려고 했다 쫓아도 다시 날아와 앉았다 내 속이 맛있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은 맨발로 잘 걸어 다닌다 사원에서도 집에서도 맨발이다 수첩 속은 검은 글씨에서 파란 글씨로 바뀐다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남자가 탑을 돈다 언제나 그렇지만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심심해진다 수첩에 적어가던 잠언 하나를 왼다

 

-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나를 죽이지는 않는다

그대도 살아야하니까

그대 때문에 불편하긴 하지만

나도 살아야하니까

참는다

 

어쩌면 나도 병이다

인간이라는 병

나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면서

살아 남는다

나도 누군가의 감옥이다

그대의 시선을 피하고 싶듯

내 시선을 피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나와 더불어 살아간다

살아야하니까

나를 만난다

그대가 나를 만나고

내가 그대를 견디듯

우리는 순간순간 웃기도 한다

안부를 묻기도 하고

잠시 헤어지고자

퇴근을 한다

안녕히 가세요가 아니라

다녀오세요 인사를 건네며

 

우리는 다정하다

함께 누군가를 욕하기도 하지만

서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하지 않지만

그런 척 살아간다

살아야하니까

살아야하니까

그럴 수 있다

 

누가 내 삶을 모두

살다 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떨어지지 않는 병도

누가 앓고 갔던 병이다

기침 소리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기억한다

골목을 들어설 때

아버지가 오는구나 알게 했던

그 기침을 내가 앓고 있다

그리고 또 누가 나를 살아버렸나

페르난두 페소아

죽은 후 발견된 그의 가방엔

일기가

일기가 가득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서

그의 작품은 일기가 되었다

그가 죽어서

그의 외로움이 사라졌다

 

내가 죽으면 외로움이 따라 죽을 것이다

살고 싶어서

외로움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기침소리

기침소리가 계속 된다

 

 

 

 

 

 

 

 

 

 

 

4

 

 

너의 옳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너는 내가 틀렸으면 한다

우리는 같은 결과를 원한다

다만 너는

22를 곱할 뿐이고

나는

-2-2를 곱하려 할 뿐이다

4를 얻기 위하여

너는 내가 -22를 곱하기를 기다린다

손실이 생기기를

그래서 너의 계산이 옳음을 밝히고 싶어서

나라고 안 그렇겠는가

2를 선택한 네가 다음엔 -2를 뽑았으면 한다

다른 편에 서 있으면 저절로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나의 실수가 너를 안심 시킨다

나는 안 그렇겠는가

점점 나의 실수를 네 마음이라 생각하게 된다

오래 생각하고 반성하고 망설이고 돌아보면 실수한다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옆에 커피 잔이 놓여 있으면 덜 심심하다

아는 할머니 한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라고 한다

 

해질녘

 

그게 더 예뻐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모르고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

하늘에서 하얗게 내린 눈이

쌓여서 어떻게 푸른 빙하를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세상을 신비롭게 만든다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삶을 사랑한다

영원히 궁금해 할 수 있는 삶

 

내게 모든 진실이 필요한 건 아니다

 

 

 

 

 

 

 

 

 

 

 

 

 

크로스바

 

 

-난쟁이라는 말에는 키가 작다는 뜻도 있지만 더 클 수 없다는 뜻도 있다. 어디선가 들었거나 갑자기 떠오른 말이다.

 

1

운동장에 크로스바가 있기에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걸 본 선생님이 내게 높이뛰기를 하라고 했다. 겨울엔 공설운동장에 비닐하우스를 쳐 두고 도약 훈련을 했다. 개구리도 아닌데 개구리 점프를 하고 독립운동가도 아닌데 만세 점프를 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뭉게구름처럼 생겨났지만 부들부들 떨렸다. 한바탕 비를 쏟아놓기도 했다. 내 키를 넘어야 했다. 내 키가 나의 한계였다.

 

2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전국체전에 참가했다. 148센티미터에 불과 했던 나는 무려 153센티미터나 넘었다. 3등이었다. 만족스러웠다. 1등은 160센티미터를 넘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키는 170센티미터였다. 자기 키를 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이 그랬다. 자기 키의 얼마보다는 그냥 얼마를 넘느냐가 중요했다. 네 키를 넘으면 돼. 내게 기준을 세워주었던 선생님을 바라봤다.

 

3

대회가 끝나고 선생님은 내게 그만 두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키를 물어보시고 난 후였다. 나는 선생님의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버지는 165였고. 어머니는 160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내 키를 뛰어넘어도 내 키엔 한계가 있다. 지금은 체육인이 아니라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성실함으로 물려받은 것을 뛰어넘기 힘들다. 겨울 공설운동장에서처럼 비닐하우스를 치고 열심히 도약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보인다. 넘을 수 없는 크로스바가 허공에 밑줄 긋고 있다.

 

 

 

 

 

 

 

 

 

 

 

 

산책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쓸쓸하였다

공원의 벤치에 가 앉았다

아이들이 그네에 와서 놀았다

머리는 말끔하였지만

쓸쓸하였다

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네가

누군지 알 수 없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

너를 그리워하는 일이 힘들다

무언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할지 몰랐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점점 나를 잃어버릴 것이다

절반을 잃어버리면

나머지 절반은 버려야 하는

신발처럼

귀걸이처럼

무엇을 남긴다면 결국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파경은 헤어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그냥 파경이다

 

 

 

 

 

 

 

 

 

 

 

 

 

빈센트

 

 

오늘 밤도 걷습니다

제 나이를 걸어갔던 당신을 떠올리며

당신처럼 이가 빠지거나

붓을 들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갈 차비도 두둑합니다

사람들은

살아서의 당신보다

죽어서의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저들이 당신 그림을 흉내 내는 것을 보니

저의 고민 또한

누군가 이미 해버린 고민입니다

사물들이 가진 쓸쓸함이

제 속에서 오는 것인지

그들 속에 있던 것인지

그런 것이 궁금합니다

이 도시의 전쟁을 담은 그림 한 장

눈에 붕대를 감고 죽은 친구 옆에서

작은 스푼으로 음식을 떠먹는 소년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워 해도 되나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진지한 저의 감정이

가짜가 되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사춘기에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

당신의 그림 속 별들처럼 소용돌이치는 밤

당신이 걸어보지 못한

지도 위의 점들을 걷습니다

내부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초저녁부터

이 거리의 창들은 태어났고

어둠이 가진 빛을 보여주기 위해

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빛을 향해 당신은 걸어갔고

저는 지금 당신의 무덤을 향해

걷고 있는 중입니다

 

 

 

 

 

 

 

 

 

 

 

한 잔

 

 

창밖에 눈이 내린다

맘껏 나눠가져도

모자람이 없는 풍경

 

누군가 물을 따라 놓았다

컵에 물이 가득차면

마음이 가볍지 않다

갈증이 나도 부담스럽다

 

어제 누군가

자신의 컵에서 따라준 커피는

가득 차지 않아도

한 잔이었다

 

 

 

 

 

 

 

 

 

 

상추

 

 

상추가 자라고 있었다.

밑을 따주면 더 잘 자란다기에 그렇게 했다.

 

상추가 잘 자라면 결국 내가 먹는다.

상추는 무엇을 위해서 자라는 걸까?

열심히 자랄수록 열심히 내가 딴다.

 

상추들도 이런 대화를 나눌까?

열심히 살아야해.

부지런한 게 좋아.

 

서로를 비교할까?

쟤 잎사귀가 더 크구나.

 

그렇게 비교할수록

결국엔 내가 좋겠지?

 

상추의 입장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입장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칭찬 받는 게 좋아서

나는 참 열심히 일했다.

 

 

 

 

 

 

 

 

 

 

 

 

해변

 

 

모래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외로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아무래도 관성 같았다

그렇게 해왔기에 타성이 붙어버린

몹쓸 물건 같았다

 

캄캄한 해변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래가 젖었는지 엉덩이가 축축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일어서 돌아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왔기에 돌아가기가

버거웠다

 

나는 어딘가에서 멀리 벗어나버린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 고독해서

어떤 것도 그리워 할 수가 없었다

 

 

 

 

 

 

 

 

 

 

 

하상만 시인

2005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간장,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9회 김장생 문학상 대상 수상, 9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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